전문가 칼럼
도시는 시민이 선택한 정치를 닮는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 [도시를 바꾸는 정치와 정치인, 그리고 시민]③
경제 위기를 시민과 함께 극복한 도시, 아인트호벤
결단과 추진력으로 만들어 부활한 피츠버그

[김현아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전 국회의원] 위기가 닥치면 정치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그 해답을 보여준 사례가 바로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의 전 시장 롭 판 기이젤(Rob van Gijzel)이다. 2008~2016년 시장으로 활동한 그는 취임하자마자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해 아인트호벤을 세계적인 스마트시티로 변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아인트호벤은 지역경제의 중심이던 필립스 등 대기업이 흔들리며 대규모 실업이 우려됐다.
판 기이젤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주요 기업 CEO들을 긴급히 불러모아 단기 근무제를 도입했다. 단기 근무제는 기업이 정규직 근로자의 근무 시간을 줄여 인건비 부담을 완화하고 고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다. 이는 해고 대신 근로시간 단축을 통해 숙련 인력을 유지하고, 정부의 보조금을 활용해 기업의 부담을 줄는 장점이 있다. 근로자에게는 고용 안정성과 일·생활 균형을 제공한다. 판 기이젤은 이 제도를 통해 아인트호벤 지역의 대량 실업을 방지하고 위기 극복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지식근로자 지원제도도 활용했다. 전문성과 경험을 가진 인재들이 조직 내에서 지속적으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교육‧지식 공유‧성과 보상 체계를 강화했다. 해고 대신 일자리를 나누는 방식으로 고용을 지켜낸 것이다. 이 방안은 훗날 네덜란드 전체로 확산되며 위기 대응의 대표 사례가 됐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점은 시민들을 변화의 주인공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판 기이젤은 ‘마크트 메’(Maak’t Mee)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예산 사용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했다. 공원 조성부터 교육 프로그램까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졌다. 버려진 공간은 예술과 공동체 활동으로 되살아났고 스마트시티 기술은 시민들의 제안에서 출발했다. 판 기이젤의 리더십은 위기 앞에서 ▲빠른 결단력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력 ▲그리고 시민을 믿는 용기까지 이 세 가지가 있다면 도시도 사람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다.
피츠버그, 철강 도시에서 기술 도시로
한때 ‘강철의 도시’로 불렸던 미국 피츠버그는 1980년대 철강산업의 붕괴와 함께 깊은 침체에 빠졌다. 불과 3년 사이에 9만5000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고, 일부 지역의 실업률은 27%를 넘었다. 사람들은 해마다 수만 명씩 도시를 떠났다. 1990년대 초에는 도시 재정이 파탄 직전까지 몰렸다. 바로 이 시점에서 시장으로 취임한 인물이 토마스 J. 머피 주니어(Thomas J. Murphy Jr.)다.
머피 시장은 위기를 도시 재설계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긴축이 아닌 투자로 대응했다. 그는 공공과 민간이 협력하는 ‘PPP’(Public-Private Partnership) 모델을 도입해, 총 45억달러에 달하는 민간 투자를 유치했다. 그 중심에는 도시의 핵심 자산이었던 황폐한 철강공장 부지 재개발이 있었다. 그는 이 부지를 매입해 상업·주거 복합단지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 중 하나인 ‘사우스사이드 웍스’(Southside Works)는 과거 그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철강공장을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시킨 사례였다. 인상적인 점은 이 모든 일이 피츠버그가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재정위기 도시로 평가받던 시기에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그는 시 예산의 25%가 부채 상환에 쓰이던 상황에서 과감히 펜실베니아 주정부의 Act 47 재정위기관리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외부의 엄격한 재정 감시를 수용하는 대신, 장기적 도시 재생을 위한 정책적 자유를 확보했다. 머피는 도시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경제 생태계 자체를 바꾸는 데에도 집중했다. 그는 지역의 유명 대학인 카네기멜론대학과 피츠버그대학과 협력해 첨단 기술 기업들을 도시로 끌어들였다. 구글‧애플‧우버 등 글로벌 혁신 기업들이 피츠버그에 연구센터를 설립하며 도시의 경제 구조는 철강에서 기술과 지식 산업으로 급격히 변화했다.
도시의 환경을 더욱 살기 좋게 개선하는 데도 힘썼다. 시민들을 위해 25마일에 이르는 자전거와 보행자 트레일을 강변에 조성하고 도시 전역에 녹지 공간을 확대했다. 처음에는 시민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프로젝트는 도시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받았다. 머피 시장은 어려운 결정과 비판을 감내하면서도 긴 호흡으로 도시의 미래를 설계한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미래, 결국 우리가 선택한 정치의 결과
두 사례는 모두 위기 속에서 도시의 미래를 재설계한 리더들의 이야기다. 산업 쇠퇴와 경제 불안 속에서도 장기적 관점의 정책을 추진하며 시민 중심의 전환을 이끌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판 기이젤은 시민 참여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조율형 리더십’이었다면, 머피는 결단과 추진력 중심의 ‘실행형 리더십’이었다. 전자는 신뢰와 합의, 후자는 속도와 방향성이 강점이었다. 도시를 바꾸고 살린다는 목표는 같았지만 리더십의 성향은 달랐던 것이다.
지금 이 도시들은 그들이 선택한 리더십을 닮은 모습을 띠고 있다. 정치 리더를 선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내리는 정치적 선택이 곧 우리가 살아갈 도시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도시 하나도 이처럼 리더의 철학과 결단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리더는 누구일까?
중요한 것은 정당의 색깔이나 이념보다 실제로 위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인지 판단하는 일이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국민을 설득하며 미래를 위해 당장은 인기 없는 결정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있는 후보.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공공과 민간, 중앙과 지방의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후보. 우리는 그런 리더를 선택해야 한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권 교체나 연장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위기 앞에서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는 시간이다.
우리 삶의 기반이 되는 도시를 살린 리더십에서 교훈을 얻는다면 멀리 보고 꾸준히 가는 정치인, 분열대신 통합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은 물론 야당과도 소통하며 국가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리더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던진 한 표가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준다. 우리가 만나는 미래는 결국 오늘 우리가 선택한 정치와 시민 참여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수백억 원으로 늦춘 리빌딩, 부작용도 커졌다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이데일리
일간스포츠
이데일리
수백억 원으로 늦춘 리빌딩, 부작용도 커졌다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대선 막판 불거진 '리박스쿨'과 '짐로저스'…지지율 변화 있을까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단독]프리드 인수한 웅진, 터키 렌탈 사업 정리…체질개선 속도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일라이릴리' 키워드에 국내 바이오 시장 들썩…다음 기술계약은 누구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