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CONOMIST

오피니언

오피니언

그럴듯한 ‘스펙’에 ‘일 잘하는’ 인재 놓칠 수 있다 [순화동필]

전문가 칼럼

우리 조직에 적합한 지원자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요즘처럼 이력서부터 면접 답변까지 잘 다듬어진 표면적인 정보에 의존하는 채용 구조에서, 실무에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지원자를 가려내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문득 첫 창업 당시에 함께했던 300명 이상의 동료들이 떠올랐다. 그중 실력에 비해 자기 표현에 능한 이들은 이직 시장에서 빠르게 좋은 조건으로 옮겨갔다. 반면,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성과를 만들어낸 인재들은 정작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처음으로 채용시장의 판단 기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AI로 평준화된 자소서…채용의 본질 흔들려 지금 우리는 '정답 없는 채용'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직은 자연스러워졌고, 경력은 표준화됐다. 대부분의 지원자는 세련된 이력서와 완성도 높은 자기소개서를 갖춰 면접장에 들어선다. 특히 최근에는 생성형 AI의 확산으로 자기소개서 자체가 평준화되고 있다.지난해 국내에서 제출된 자기소개서 89만 건 중 약 48.5%가 생성형 AI를 활용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됐다. 문장은 매끄럽고 형식은 갖춰졌지만, 개별 지원자의 개성은 흐려지고 내용은 점점 더 비슷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정제된 외형만으로는 이 사람이 협업에 적합한 인물인지, 조직과 잘 맞는 사람인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는 서류만의 문제가 아니다. 면접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겸손하고 내실 있는 사람은 자기 표현에 서툴다는 이유로 탈락하고, 반대로 말재주가 좋은 사람은 실력 이상의 평가를 받는다. 이런 상황을 반복해서 마주한 끝에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금 우리가 판단하는 채용 기준이, 정말 역량 있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고 있는지 다시 질문해 볼 시점이다.성과 중심 채용에서 업무의 맥락을 읽는 시대로최근 인적자원(HR) 실무자들은 성과를 검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결과를 만들어낸 업무 방식과 협업 태도까지 함께 살피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채용 방식으로는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어렵다. 이력서와 면접은 결과 위주로 요약된 정보만을 제공할 뿐, 실제 업무 환경에서의 역할과 협업 스타일은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일부 대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진행해온 ▲팀 단위 과제 ▲토론 면접 ▲상황 시뮬레이션 등의 과정 중심의 평가가 이와 같은 맥락이다. 개인의 역량을 넘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고방식과 팀워크, 컬처핏 등을 입체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접근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스타트업에서는 특히 ‘컬처핏’(조직문화 적합성)이 중요하다. 실무에 바로 투입해야 하는 인력일수록 조직문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팀과 조화를 이루는지가 성과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스타트업은 자사의 조직 문화를 문서화한 ‘컬처덱’을 지원자에게 제공하거나, 직무 인터뷰 이후 별도의 컬처핏 인터뷰를 진행해 이를 확인하고 있다.다만 부족한 시간과 비용, 표준화된 평가 체계의 부재 등으로 인해 이러한 시도는 일부 기업에만 국한돼 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많은 인사담당자들이 지원자의 전 직장 상사에게 연락하거나 업계 네트워크를 통해 간접적인 정보를 얻는 방식의 ‘레퍼런스 체크’를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레퍼런스 체크 방식은 상당한 시간과 인력이 요구된다. 또한 정보의 출처나 전달 방식이 일관되지 않아 실무에 체계적으로 활용하기 어렵다.최근에는 기존의 레퍼런스 체크 방식을 보완하고자, 비정형적인 정보를 보다 구조화해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평판자 풀을 확보하고 지원자에 대한 공통된 키워드나 정성적 역량에 대한 정보가 누적되면, 한 명의 주관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경험이 축적된 객관적인 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다. 예컨대, ‘일처리는 빠르지만 꼼꼼함은 부족한 편’과 같이 구체적인 업무 스타일과 조직 적합성을 함께 짚어주는 실질적인 평가가 가능해진다.스펙터는 평판 조회의 전 과정을 디지털화해, 하나의 플랫폼으로 구현했다. 지원자의 과거 업무 경험을 통해, 현재의 조직과 잘 맞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다면적인 평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이 지원자의 동의와 자발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지원자가 직접 레퍼리(평판 제공자)를 지정하고 평판 열람에 동의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기업은 지원자의 일하는 방식을 확인하고, 지원자는 자신과 맞는 조직을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채용 실패의 리스크를 줄이고, 기업과 지원자 모두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HR 테크 솔루션, 채용 의사결정에 도움 조직에 적합한 인재를 채용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이에 스펙터는 평판조회 플랫폼은 물론, AI 기반의 면접 분석 앱 ‘테오’(TEO’와 지원자의 입사 후 3개월을 예측할 수 있는 프리미엄 평판조회 ‘휴먼 인사이트’ 등 다양한 HR 테크 솔루션 등이 보다 정교하고 신뢰도 높은 의사결정을 지원한다.이직과 채용이 반복되는 유동적인 시대이기에 함께할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역량이 조직의 지속성과 경쟁력을 좌우한다. 그 시작점은 객관적으로 검증된 평판에 있다. 그 평판이 구조화된 데이터로 축적될 때, HR은 단순한 인사 업무를 넘어 인재를 식별하고 연결하는 조직의 전략적 축이 될 수 있다.

2025.08.31 08:00

4분 소요
‘악마의 와인’을 모두가 사랑하게 됐다 [와인인문학]

유통

수많은 종류의 와인 중에서도 샴페인은 언제나 특별한 이야기꾼이다. 경쾌하게 터지는 코르크 소리와 섬세하게 피어오르는 금빛 기포 그리고 입안을 채우는 짜릿한 생동감까지. 이 한 잔의 와인에는 격동의 역사와 인간의 욕망 그리고 빛나는 성공의 순간들이 농축돼 있다.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악마의 와인’이야기의 시작은 프랑스 북부의 춥고 척박한 땅인 샹파뉴 지역이다. 이곳 사람들은 남쪽 부르고뉴의 화려한 레드 와인을 선망했지만 샹파뉴의 서늘한 기후는 포도가 완전히 익는 것을 방해했다. 그 결과 이 지역 와인은 묽고 산도가 날카로웠다. 겨울 추위는 발효 중인 와인을 잠재웠고 봄이 돼 기온이 오르면 병 속에서 다시 발효를 시작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가스로 병이 폭발하기 일쑤였다. 와인 생산자들은 예측 불가한 거품을 ‘악마의 와인’(le vin du diable)이라 부르며 저주했다.이처럼 샴페인의 시작은 원치 않았던 거품, 즉 ‘실수’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역사의 위대한 전환은 종종 우연한 발견을 필연적인 기술로 바꾸는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17세기 후반 영국인들은 ‘터지는 와인’의 매력에 먼저 눈을 떴다. 그들은 완성된 와인에 당분을 첨가해 의도적으로 기포를 만드는 방법을 제안했다. 석탄으로 유리를 녹여 고압에 견딜 수 있는 유리병도 만들어 냈다. 샴페인의 거품은 결함이 아닌 축제와 흥겨움을 상징하는 특별한 개성으로 여겨졌다.샴페인의 역사를 논할 때 돔 페리뇽(Dom Pérignon)이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빨리 와보게, 나는 지금 별을 마시고 있네!”라는 그의 외침은 샴페인의 탄생을 알리는 낭만적인 신화로 전해진다. 다만 엄밀히 말해 그는 샴페인을 발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와인 속의 거품을 없애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에 가깝다.돔 페리뇽의 실제 기여는 발명이 아닌 ‘품질의 완성’에 있다. 그는 각기 다른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를 섞어 훨씬 더 복합적이고 균형 잡힌 와인을 만드는 ‘블렌딩’(assemblage) 기술을 체계화했다. 또 껍질이 검은 포도에서 맑은 즙을 얻어내는 섬세한 압착 기술을 고안했다. 폭발 위험을 줄이기 위해 코르크 마개를 철사로 고정하는 방식도 도입했다. 그의 헌신과 집념은 샴페인이 단순한 ‘거품 와인’을 넘어 깊이와 복합미를 지닌 고급 와인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견고한 토대를 마련했다.돔 페리뇽이 닦은 품질의 기반 위에 샴페인은 프랑스 왕실과 귀족 사회의 총아로 떠올랐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리는 화려한 연회에는 어김 없이 샴페인이 등장했다. 그 황홀한 기포는 구체제(Ancien Régime)의 사치와 쾌락 그리고 ‘삶의 기쁨’(joie de vivre)을 완벽하게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루이 15세의 연인 마담 드 퐁파두르는 “마시고 난 뒤에도 여성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와인이 샴페인이다”라는 찬사를 남겼다. 위기 속 더욱 빛나는 샴페인의 가치아이러니하게도 귀족 계급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은 샴페인의 명성을 전 유럽으로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혁명의 칼날을 피해 해외로 망명한 귀족들이 유럽 각국의 사교계에 샴페인을 전파하는 문화 전도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샴페인은 런던·빈·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왕실과 살롱에서 가장 세련되고 인기 있는 음료로 자리 잡았다.이 기회를 포착한 것은 귀족이 아닌 비전을 가진 부르주아 가문들이었다. 모엣·뵈브 클리코·로랑 페리에와 같은 샴페인 하우스는 우수한 품질에 ‘브랜드’라는 무형의 가치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샴페인의 위대한 여인’이라 불리는 클리코 퐁사르당이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미망인’(Veuve)이 된 그녀는 샴페인의 찌꺼기를 제거하는 ‘리들링’(riddling) 기술을 발명해 품질의 혁신을 이뤘다. 전쟁으로 봉쇄된 러시아 시장에 몰래 샴페인을 수출하는 대담함으로 유럽 전역에 ‘뵈브 클리코’의 이름을 떨쳤다. 이처럼 샴페인 하우스들은 왕실 후원과 국제적인 이벤트 그리고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통해 자신들의 와인을 단순한 술이 아닌 성공과 명예의 상징으로 각인시켰다.사치품의 정점에 있는 샴페인의 역사는 순탄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포도밭이 파괴됐고 대공황과 금융 위기 등 세계 경제가 휘청일 때마다 샴페인 시장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그럼에도 샴페인은 놀라운 회복력으로 위기를 극복해 왔다. 그 저력의 핵심에는 ‘샹파뉴 와인 생산자 공동 협회’(CIVC)라는 독특한 상생 시스템이 있다.CIVC는 포도 재배자와 샴페인 하우스가 함께 설립한 기구다. 매년 포도 수확량과 가격을 조율하고 엄격한 품질 기준을 관리하며 ‘샴페인’이라는 이름의 가치를 공동으로 지켜 나간다. 경기가 어려울 때 무분별한 가격 경쟁으로 품질이 저하되는 것을 막는다. 호황기에는 과잉 생산을 억제해 안정적인 시장을 유지한다. 이는 단기적인 이익보다 ‘샴페인’이라는 공동의 유산을 지키려는 그들의 자부심과 지혜가 낳은 결과다.한 잔의 샴페인에서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기포는 단순한 탄산가스가 아니다. 그것은 추운 땅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와인 생산자들의 열망이자 돔 페리뇽의 숭고한 장인정신이다. 베르사유의 화려함과 혁명의 격동을 모두 목격한 역사의 증인이다. 또 위대한 여성 사업가의 비전과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스스로의 가치를 지켜낸 샹파뉴 사람들의 굳건한 연대다.우리가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샴페인을 터뜨리는 이유는 단지 그 맛과 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이 황금빛 액체가 품고 있는 성공과 환희 그리고 역경을 이겨낸 승리의 서사를 빌려 우리의 순간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고 싶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다음번 건배의 순간에는 잠시 귀를 기울여 보길 바란다. 당신의 잔 속에서 터지는 작고 영롱한 거품들이 속삭이는 수백 년의 이야기 속에는 당신의 성공을 축하하는 가장 품격 있는 찬사가 담겨 있을 것이다.

2025.08.31 08:00

4분 소요
논란의 노란봉투법, 그리고 절제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우원식 국회의장은 최근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이 2015년 처음 발의된 지 10년 만에 국회 문턱을 넘자 남다른 소회를 밝혔습니다. 우 의장은 “노란봉투법은 노동 현실, 특히 하청 노동자 등 직원을 직원이라 부르지 않고, 사장을 사장이라 부르지 못하는 더 어렵고 취약한 노동 계층의 현실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이 법을 ‘홍길동법’이라 불렀다”며 “노동3권의 사각지대를 줄이고 좀 더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만들고자 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입법”이라고 환영했습니다. 우 의장의 말처럼 노란봉투법은 기업보다 약자인 노동자와 약자 중에서 약자인 하청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입니다. 특히 2014년 쌍용차 파업 노조원에 대한 47억원 손해배상 판결, 작년 현대제철 노조 등에 대한 200억원 손해배상 청구, 올해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473억원의 손배 청구, CJ대한통운을 점거 농성한 전국택배노조 조합원들을 상대로 한 20억 손배소 제기 등 어마어마한 손해배상액 때문에 노동자를 사지로 내모는 일부 기업의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 사용자 범위를 확대해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과 교섭 등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노동 현실에서는 기업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도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생긴 셈입니다. 기업들은 노란봉투법으로 노조의 파업이 일상이 되고, 하청 노동자의 ‘원청 사장 나오라’는 교섭 요구가 빗발쳐 결국 회사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고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노란봉투법 통과 이후 하청 업체 노조들의 원청 교섭 요구가 줄줄이 터져 나올 조짐이 보이고 있는데요,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제철·네이버 등의 협력사 및 자회사 노조 등은 원청 대기업이 직접 나서 임금이나 고용·복지 등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기업들은 지금은 일부에서 이 같은 움직임을 보이지만, 6개월 후 노란봉투법이 본격 시행되면 사방팔방에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올 것이라며 한국을 떠나는 기업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사실 트럼프발 관세 등으로 글로벌 교역 환경이 급변하면서 국내 제조 기업들이 생산 거점을 미국으로 옮기고 있는데요, 올해 1분기에만 북미 신규 설립 법인 수가 31개로 유럽보다 4배 이상 많았습니다. 이런 흐름은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이는데요, 여기에 노란봉투법 등으로 사업 환경이 친노동화하면 기업들의 해외로의 탈출 러시가 더욱 가속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국내에 들어와 있는 해외 기업들도 마찬가지인데요, 노동자에게 결코 이로운 일이 아닙니다. 노동자들도 노란봉투법이라는 무기를 쓸 때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마구 휘두른다면 기업들에게도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다시 쥐어질 것입니다. 이번 노란봉투법은 일부 기업이 자신의 힘을 과도하게 행사했기 때문에 탄생한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와 정부는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개념 등 노란봉투법의 불명확성으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보완 입법이 필요하다는 경제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025.08.31 07:00

2분 소요
中 단체 무비자 입국 허용… 방한 포상관광 시장 ‘훈풍’ 맞나 [E-MICE]

전문가 칼럼

방한(訪韓) 포상관광 시장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정부의 중국인 단체 방문객에 대한 무비자 입국 허용으로 중국인 대형 포상관광단 복귀가 가시화되면서다. 내년 6월 말까지 ‘한시적’이긴 하지만 한중 양국은 상호 무비자 입국 환경을 갖추게 됐다. 한국 단체여행을 금지한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에 이은 코로나19 사태로 이미 대만, 동남아 등으로 시장을 다변화한 방한 포상관광 시장이 중국의 복귀로 ‘제2의 호황기’를 맞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중국은 한때 전체 방한 포상관광단의 절반에 가까운 절대 비중을 차지하며 ‘큰손’으로 군림했다. 2015년 9만여명에 이어 2016년엔 12만명이 넘는 중국인 포상관광단이 찾아 호황 분위기를 이끌었지만, 2017년 중국 정부의 한한령 조치로 수요가 급감했다. 2019년 10만명 수준까지 ‘반짝’ 회복세를 보이기도 했지만, 곧바로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재차 발길이 끊어졌다.최근엔 미국과의 통상 갈등에 중국 내 경기 불황이 더해지면서 여전히 70~80%의 더딘 회복세에 머물고 있다. 여기에 2년 전 중국 정부가 한한령을 해제했지만 대형 단체 파견에 대한 중국 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방문 횟수는 물론 수천 명에 달하던 규모도 수백 명 단위로 쪼그라든 상태다. 한 포상관광 전문 여행사 관계자는 “그동안 방문 시기, 규모 등을 확정 짓고도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일정을 무기한 연기하거나 아예 행선지를 일본, 동남아 등으로 틀어버린 포상관광단도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中 단체 무비자 허용에 분주해진 지자체들관련 업계는 한한령에 이은 코로나19 팬데믹, 경기 불황으로 급감했던 중국 내 방한 포상관광 수요가 무비자 입국 허용으로 반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중국 대형 포상관광단으로 호황을 누렸던 지자체들의 발길이 분주해지고 있다. 9월 29일 무비자 입국 허용 시점에 맞춰 계획했던 초청 상담회, 현지 로드쇼 등 프로모션 프로그램을 속속 실행 단계로 전환하고 있다.중국 기업·단체를 대상으로 포상관광 수요 선점에 가장 먼저 나서는 곳은 부산이다. 지난해 상하이에서 처음 단독 로드쇼를 연 부산은 9월 2일 상하이 하얏트 호텔에서 두 번째 로드쇼를 준비 중이다. 지역 마이스 기업 10곳이 동행하는 로드쇼에선 현지 여행사 등 기업·단체 대상 설명회에 이어 실질적인 방문 수요를 잡기 위한 일대일 B2B(기업 간 거래) 상담도 진행할 예정이다. 인천은 9월 2일 송도컨벤시아에서 중국 현지 여행사와 기업·단체 관계자가 참가하는 트래블 마트로 ‘안방 마케팅’에 나선다. 특히 올해는 그동안 대만, 일본, 동남아 등 국가별로 고르게 배분했던 바이어 구성을 바꿔 전체 30명 해외 바이어 중 절반을 중국 바이어들로 채웠다. 서혜란 인천관광공사 차장은 “그동안 중국 포상관광단이 방문한 적이 없는 강화도 등 새로운 지역과 시설을 둘러보는 현장답사 일정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인천은 10월 중국 하이난성 싼야 폴리국제전시장(PIEC)에서 열리는 ‘국제 여행 서비스 전시회’에도 대표단을 꾸려 참가한다. 중국여행사협회가 올해 처음 여는 행사에 중국 전역에서 기업·단체를 주 거래처로 둔 여행사 관계자 5000여명이 참가한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계획을 추가했다. 싼야 ‘국제 여행 서비스 전시회’엔 서울과 부산, 강원 등 지자체도 참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지난해 상하이에 사무소를 개설한 경기도는 본격적인 프로모션에 앞서 현지 네트워크를 가동해 수요 파악에 착수했다. 강동한 경기관광공사 관광사업실장은 “지난해 12월 무비자 시행 계획이 나온 직후 현지에서 진행한 단독 로드쇼로 1차 수요는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라며 “정부가 곧 발표할 무비자 입국 세부 지침에 맞춰 하반기 프로모션 장소와 일정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무비자 대상 지역 제한 시 효과 반감될 것”극도로 얼어붙었던 시장 분위기 전환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완전한 회복을 기대하기엔 ‘시기상조’라는 주장도 나온다. 무비자 입국 허용이 한시적으로 제한적인 데다 아직 구체적인 세부 지침이 나오지 않아서다. 문화체육관광부·법무부·외교부 등 관계 부처는 아직 중국인 단체의 무비자 입국 시 허용되는 체류 기간 등 세부 운용지침을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관련 업계와 지자체는 정부가 곧 내놓을 세부 운영 지침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일부에선 자칫 무비자 입국 허용의 취지와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는 ‘옥상옥’과 같은 절차, 제도가 더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관련 업계에선 특정 도시에서 출발하는 인원으로 무비자 입국 대상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에 강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실제로 지난 4월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는 중국인 불법체류자 급증을 우려해 무비자 입국 허용 대상을 특정 도시(출발지 기준)로 제한하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1선과 신(新)1선 도시부터 5선 도시까지 총 6개로 나뉘는 등급 기준에 따르면 1선 도시는 베이징과 상하이·광저우·선전 등 4곳, 신1선 도시는 청두·충칭·항저우·우한·심양·시안·칭다오·톈진 등 15곳이 포함된다.리쭈위안 중국여행사협회 비서장은 “소수 도시로 무비자 입국 대상을 제한하면 포상관광단 등 단체 방문이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으로 우려했다. 이어 “최소한 닝보와 쿤밍·샤먼·다롄·하얼빈 등 2선 도시에 최근 경제력이 급상승한 하이커우 등 3선 도시까지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다.무비자 입국 허용으로 적용 대상이 된 ‘전자여행허가제’(K-ETA)도 초미의 관심사다. 현재 미국·일본·캐나다·노르웨이 등 22개 국가의 국민은 올해 말까지 한시적으로 K-ETA 없이 한국 입국이 가능하다. 정부는 지난 7월 6일 김민석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관광 활성화 미니 정책 TF 회의’에서 K-EAT 면제 대상과 기간 연장을 검토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현지는 물론 관련 업계는 무비자 정책 시행에 더해 중국도 K-ETA 면제 대상에 포함되기를 바라고 있다. 기업체가 실적이 우수한 직원에 대한 보상과 격려를 위해 운영하는 포상관광 프로그램은 참가자의 소속과 신분이 확실해 불법체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유에서다. 리쭈위안 비서장은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한 건 맞지만 관광 교류를 활성화를 위한 무비자 도입의 원래 취지와 목표를 훼손하는 건 한중 양국 관계 개선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조언했다.

2025.08.30 08:00

5분 소요
유통산업 도약 위한 트리거..."공생관계 지속되지 않을 것" [불붙은 퀵커머스 전쟁]③

유통

유통업계의 미래는 속도전으로 전망된다. 바로 퀵커머스(Q-commerce)로 재점화될 배송 속도 전쟁이다. 퀵커머스는 고객 주문 후 30분 이내에 상품을 배송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적인 점을 감안해 1시간 이내로 보는 견해도 있다.얼마 전까지 유통 시장의 화두는 당일배송과 새벽배송이었고 시장 내 서열 정리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최근 배달플랫폼과 유통 대기업, 다이소와 네이버 쇼핑까지 퀵커머스 시장에 진출하며 시장 지형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쿠팡 로켓배송 성공의 학습 효과퀵커머스에 기업들이 빠르게 반응하는 이유는 이미 로켓배송을 통해 유통 시장에서 배송 속도의 중요성과 늦은 대응으로 인한 시장에서의 도태를 경험한 유통산업 전반의 학습효과 때문이다.국내 유통업계는 1990년대 유통 시장 개방 이후 폭발적인 성장을 했고 그 중심에는 대형마트가 있었다. 견고한 대형마트 아성을 한 번에 무너트린 건 쿠팡의 빠른 배송 서비스인 로켓배송이다. 로켓배송은 풀필먼트(Fulfillment) 물류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풀필먼트는 전 세계 이커머스 1위 기업 아마존이 만든 물류 시스템이다. 도시 옆에 대형 물류센터를 건설한 후 도시에 거주하는 소비자가 구매할만한 상품을 미리 물류센터에 갖다 놓고 주문이 오면 즉시 배송해 배송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한 물류 시스템이다.아마존은 풀필먼트로 기존에 일주일 걸리던 온라인 쇼핑 배송기간을 3일 이내로 단축하며 미국 내 유통 시장을 단숨에 손에 넣었다. 국내에서는 아마존 풀필먼트를 벤치마킹한 쿠팡이 전년 매출 40조원을 넘기며 국내 1위 유통기업으로 성장했다. 쿠팡의 성공을 본 유통업계는 배송 속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넥스트 스텝으로 퀵커머스에 주목하고 있다.퀵커머스 시장을 노리는 업체는 크게 세 진영으로 나뉜다. 먼저 전통의 유통 진영인 대형마트, 기업형 슈퍼마켓 그리고 편의점이다. 다음으로는 최근 틈새에서 주류로 성장한 다이소, 올리브영 등 신규 오프라인 강자들이 있다. 오프라인 업체들은 이커머스 기업에 뺏긴 주도권을 찾아올 기회로 보고 있다. 이미 퀵커머스 사업을 운영 중인 배달플랫폼과 이커머스 유통기업들도 기어를 올리고 있어 퀵커머스 시장은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예상된다.전 세계적으로 퀵커머스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의 퀵커머스는 지난 2014년 서비스가 처음 도입됐다. 올해(2025년)는 현지 퀵커머스 시장이 1조 위안(195조 원) 규모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퀵커머스 시장은 저렴한 인건비와 거대 기업의 전폭적인 투자에 따라 폭발적으로 성장 중이다. 유통기업이 슈퍼마켓을 기반으로 퀵커머스 서비스를 도입해 성장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제 중국에서는 슈퍼마켓과 자영업 상점의 상품을 퀵커머스를 통해 구매하는 것이 일상이다.중국 사례에서 보듯이 소매 퀵커머스가 초기 안정 궤도에 올리려면 배달 비용의 부담을 낮출 높은 객단가가 중요하다. 소상공인보다는 마트나 슈퍼마켓과 연계가 필요한 이유다. 중국에 비해 대한민국은 높은 배달 라이더 비용과 유통업체의 사업성 부재에 따른 관심 저하로 늦게 시장이 열리게 됐다.4조 퀵커머스 시장 경쟁 갈수록 치열하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퀵커머스 시장이 발전할 여건과 필요성이 충분하다. 유통 시장의 핵심 가치가 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이제 고객들은 배달 비용을 당연하게 여긴다. 배달서비스가 처음 도입됐던 시기에는 배달비에 대한 반감이 높았지만 최근에는 배달플랫폼 이용자 대부분이 배달비 지출에 대한 불만이 갖지 않는다. 이는 최근 배달의민족 B마트가 연간 거래액 1조원을 달성한 것과 기업형 슈퍼마켓의 퀵커머스 매출이 두 자릿수로 증가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퀵커머스 도입에 있어 온라인과 오프라인 유통 모두 기존의 운영 방식과 큰 차이를 보인다. 온라인 유통은 기존 택배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1시간 이내’라는 배송 속도를 맞추기 위해 일정 지역을 커버할 라이더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퀵커머스 서비스를 운영할 안정적인 월간 활성 이용자수(MAU)와 묶음 배송으로 1회 배송당 객단가를 높일 다양한 상품과 이를 공급할 많은 수의 자영업 판매자(플랫폼 셀러)가 있어야 운영할 수 있다.즉 효과적인 배달 시스템과 묶음 배송이 가능한 풍부한 구색이 퀵커머스의 성공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유통업체와 배달플랫폼은 각각의 강점을 지닌다. 대형마트·기업형 슈퍼마켓·편의점 등 오프라인 유통기업은 식품과 공산품 중심의 풍부한 구색에서 강점을 갖다. 반면 배달의민족·쿠팡이츠 등 배달플랫폼은 음식점과 소매점 등 자영업 매장을 기반으로 한 검증된 배달 시스템에서 강점을 보인다.현재는 유통기업과 배달플랫폼 모두 퀵커머스 시장의 확장을 위해 서로의 장점을 활용하는 일종의 공생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퀵커머스 시장에서 경쟁이 불가피하므로 현재의 협업적 공생관계가 지속되리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배달의민족은 2018년부터 B마트 서비스에 꾸준히 투자하며 자체 도심물류센터와 효율적 배달 시스템을 모두 갖췄다. 이 기업은 현재 국내 퀵커머스 시장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 평가된다.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국내 퀵커머스 시장은 올해 약 4조원 규모로의 성장이 전망된다. 쿠팡이 로켓배송으로 신드롬을 일으켜 국내 유통 시장을 차지한 것처럼 향후 유통과 배달플랫폼 시장에서 퀵커머스는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한 트리거(기폭제)가 될 것이다. 향후 국내 500조 규모의 소매 판매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배달플랫폼과 이커머스 기업, 재도약을 꿈꾸는 유통 대기업의 사활을 건 쟁탈전이 흥미로워질 거 같다.

2025.08.30 00:00

4분 소요
'경복궁 담벼락 낙서'와 '숭례문 화재'...훼손과 처벌, 그 이후 이야기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지난 7월 25일, 불법 영상 공유사이트를 홍보할 목적으로 미성년자를 시켜 경복궁 담벼락에 낙서를 했던 강 씨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강 씨는 2023년 12월 미성년자에게 10만원을 대가로 ▲서울 종로구 경복궁 영추문 ▲국립고궁박물관 쪽문 ▲서울경찰청 동문 담벼락 등에 자신이 운영하는 불법 음란물 사이트명을 낙서하도록 지시해 문화재보호법 위반 등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사건이 일어난 그 겨울, 몇몇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실형을 선고받을지, 받는다면 몇 년 정도의 형을 받을지 등 주로 처벌의 정도에 대한 것들이었다. 2008년 숭례문 방화사건의 경우에 미루어, 길어봤자 징역 5년을 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비공식적인 답변을 했던 것 같다. 과거 숭례문 방화범은 징역 10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숭례문은 불에 활활 타 전소됐는데 징역 10년이 나왔다. 그러니 강 씨의 경우 5년 이상의 실형이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담벼락을 완전히 파괴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하지만 낙서의 주범 강 씨는 필자의 예상을 뒤엎고 항소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문화유산 파괴의 정도를 주로 고려했던 예측과 달리, 재판부는 범행의 동기와 범행 후 수사 및 재판에 임하는 태도까지 모두 반영해 중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경복궁이라는 상징적 문화재를 더럽힌 점에서 상당한 사회적 충격을 줬다”며 “불법 사이트 이용자를 통해 범죄수익을 올리기 위한 범죄였다는 점에서 범행 동기와 행태에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피고인은 수사 중 도주하기도 했고, 법정에 이르기까지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내는 등 범행 후 정황도 매우 좋지 않다”고도 했다. 이어 “모방 범죄가 바로 다음 날 발생하기도 했다”며 “담벼락 복구는 상당 예산과 인원을 들여 이뤄졌으나 완전한 복구가 어렵고 1억3000만원이 넘는 복구 비용이 들었다”고도 설시했다.훼손한 자에 대한 처벌, 그 다음은?강 씨를 비롯한 가담자들은 훼손에 따른 처벌을 받는 중이다. 이제 복구의 문제가 남았다. 경복궁 담벼락은 돌담이므로 스프레이 락커가 울퉁불퉁한 표면에 스며들어 돌을 깎아내지 않고 화학적인 방법으로만 낙서를 지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결국 물리적·화학적 방법이 모두 동원돼야 한다.다만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이 나설 필요는 적어 보인다. 화강암 위의 페인트를 지우는 작업이 고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에 고도의 예술성까지 요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과거 전소된 숭례문 복원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숭례문 사건의 경우 복원에 여러 무형문화재(현재 용어는 ‘무형유산’이다)의 개입이 필수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고가 또 터지고 만다. 어떤 사고였는지 살펴보자.숭례문 복원을 둘러싼 민·형사 판결들벌써 17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시뻘건 불꽃을 내뿜으며 타오르던 국보 제1호 숭례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 역시 2008년 2월 10일 밤 9시쯤부터 시작된 생중계 뉴스 영상을 보며 눈시울을 붉힌 기억이 있다. 특별히 문화유산 사랑이 남달랐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숭례문 방화사건은 당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줬다. 아쉽게도 숭례문의 복원 작업에서 실망스러운 뉴스는 계속 됐다.문화재청은 2009년 12월 공사에 참여할 장인으로 홍 모 단청장을 선정해 2012년 8월 본격적인 복원 공사에 돌입했다. 숭례문 복원은 기와, 단청 등 여러 부분의 장인들이 작업 영역을 나누어 진행했다. 문제는 단청 복구공사에서 발생했다. 중요무형문화재 단청장 홍 모 씨가 전통기법과 도구만을 사용하기로 한 약정을 깨고 사용이 금지된 화학접착제(아크릴 에멀전)과 화학 안료(지당)을 몰래 사용한 것이다. 홍 씨는 값싼 화학 재료를 섞어 사용하고 이 사실을 모르는 건설회사 측에 전통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계산한 비용을 청구해 실제 비용과의 차액 수억 원을 빼돌렸다. 2015년 5월 구속된 홍 씨는 2016년 6월 서울고등법원에서의 2심 재판에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2017년 8월 30일 문화재청은 무형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홍 씨의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자격을 박탈했다. 여기까지가 숭례문의 복원을 둘러싼 형사적 판단이다.민사소송은 복구공사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러 개시된다. 2013년경 단청공사가 마무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숭례문 곳곳에 하자가 발생했다. 복구된 지 3개월 만에 색칠된 단청이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정부는 감사원의 감사 과정 등을 거친 후 2017년 3월 홍 단청장과 제자인 한 모 씨를 상대로 11억8000여만원의 배상을 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무려 5년 5개월여의 긴 재판 끝에 2022년 8월 10일 판결이 나왔다. 1심 법원은 피고들의 책임을 80%가량 인정한 9억4500여만원을 손해배상액으로 선고했다.왜 정부가 주장한 금액의 80%만 인정된 것일까? 피고들이 ‘단청 박락은 화학 안료 등의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전문 기관의 감정 결과 화학 안료의 사용이 하자의 유일하고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이 고려됐기 때문이다. 국가가 홍 단청장의 경험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빠른 공사 완성을 요구했던 정황도 고려됐다. 하자 발생에는 국가의 과실도 20% 존재한다는 뜻이다. 단순 교통사고의 과실 비율에도 이런저런 말이 많은데, 국보 제1호의 복원을 둘러싼 법원의 과실 비율 결정에 양 당사자가 쉽게 수긍할 리 만무하다. 과실 비율에 대한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홍 씨 측도 국가도 1심의 과실 비율 결정에 불복할 가능성이 상당했고, 결국 재판은 항소심으로 이어졌다. 2023년 7월 14일 항소심 법원은 손해배상액을 8억2700여만원으로 더 줄여 판결했다. 홍 씨 측이 전통 재료를 사용하면 하자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문화재청에 공사 기한 연장과 화학 재료 사용을 건의했는데도 문화재청이 이를 배제하고 전통기법에 따른 공사를 강행한 점을 고려해 1심보다 손해배상금을 1억원가량 줄인 것이다. 처벌 이후의 적절한 복구에 대한 관심 필요강렬한 이미지로 남아있는 숭례문 전소 장면과 비교해, 앞서 소개한 복구와 관련한 사기와 손해배상 사건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한 번 사그라지면 다시 쉽게 불타오르지 않는 것 같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원형에 가까운 회복을 위해서는 적절한 복원이 이뤄지고 있는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스프레이 세례를 받았던 경복궁 담벼락은 어떻게 되었을까? 올봄에 전체의 80% 정도 복구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었으니, 지금은 아마도 복원을 완료했을 것 같다. 경복궁 담벼락은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문화유산의 복원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수리중’ 팻말이 걸려있는 바람에 제대로 구경하지 못해 아쉬운 관람객이 있다면, 문화유산의 복원은 결코 간단하게 진행되는 건 아니라는 걸 떠올려보자. 조금은 덜 속상할 수도 있다.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5.08.24 09:00

5분 소요
국적항공사와 국민 사이, 정부는 누구 편인가? [이근면의 시사라떼]

전문가 칼럼

상품의 영역이 사전, 사후 서비스와 리워드 프로그램까지 확장되고 경쟁력의 요소로 작동하는 시대이다. 항공사 선택에는 여러 요인 중 가격 외 서비스가 매우 중요하다. 나 역시 모 항공사의 아주 고마운 서비스에 감동한 기억이 있다. 방콕에서 귀국편 시간을 착각해 탑승을 못하게 된 적이 있는데 해당 항공사는 공항 내외의 안내 및, 재입국 출국 조치 그리고 숙박부터 익일 항공편 수배까지 넘치는 호의로 내 마음을 녹였다. 그 이후에 광저우행 항공편에서 기내에 맡겼던 상의 주머니에서 작은 불만의 보답으로 씹던 껌을 발견하고 경악했던 일이 있었다(참고로 나는 껌은 씹지 않는다). 천당과 지옥 같은 서비스를 체험했다. 나는 빠르게 변심하여 K사의 충성고객으로 바뀌었다. 항공사 선택권이 있기에 취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헌데 작금은 K항공과 A항공의 합병이 사실상 성사되면서 한국 항공업계는 단일 초대형 국적항공사 체제로 재편된다. 정부와 재계는 ‘국가 경쟁력 강화’라 설명하지만 이번 합병을 통해 정부는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기업의 이해인가, 아니면 소비자와 국민의 권익인가.초대형 국적사 출범…소비자 피해 예고된다 세계 주요국의 사례는 경고음을 울린다. 유나이티드-컨티넨탈(2010), 델타-노스웨스트(2008), 아메리칸-US에어(2013)가 차례로 합병되며 빅3 체제가 고착되었다. 합병 기업들은 서비스 확대와 글로벌 경쟁력을 약속했지만 결과는 ▲수하물 유료화 ▲좌석 선택 유료화 ▲기내식 축소 ▲마일리지 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 미국회계감사원(GAO)에 따르면 합병 이후 5년간 국제선 운임이 평균 15% 상승했다. 중소도시 노선은 대거 사라졌고 소비자는 사실상 선택권을 잃었다.유럽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루프트한자가 스위스항공·오스트리아항공·브뤼셀항공 등을 흡수하면서 초대형 항공그룹이 완성됐다. 그러나 장거리 노선 요금은 10~20% 인상되었고, 저가항공과의 가격 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EU 집행위가 뒤늦게 경쟁사 슬롯 강제할당 등 사후 조치를 도입했지만 이미 피해는 누적된 상태였다. 일본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JAL 파산 이후 ANA-JAL 양강 체제로 정비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지방노선 유지의무를 강력히 법제화하고 운수권·슬롯 배분에도 적극 개입했다. 이로써 지방 공항 접근성과 공익노선이 일정 부분 유지될 수 있었다.이 모든 해외 사례가 주는 핵심 교훈은 단 하나다. 독과점의 후유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소비자 피해로 전환된다. 이제 한국도 동일한 길을 걷고 있다. 합병 초기에는 마일리지 통합, 환승 네트워크 확대 등이 강조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격 인상 ▲서비스 유료화 확대 ▲지방노선 축소 ▲마일리지 가치 하락 ▲선택권 제한이 순차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독과점은 기업이 가격과 서비스를 독점 조정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소비자는 ‘서서히 끓는 물’ 속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정부의 사전적·구조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첫째, 공정거래위원회와 국토교통부가 공동으로 가격·서비스 감시기구를 설치하고 즉각 시정 명령권을 행사해야 한다. 둘째, 지방노선 유지의무를 법제화해 지역 간 교통격차 확대를 차단해야 한다. 셋째, 마일리지 소비자 보호법을 제정해 마일리지 가치 하락과 소멸을 방지해야 한다.이 합병은 단순한 산업재편이 아니다. 국민 이동권과 소비자 선택권을 놓고 정부의 정책 역량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정책은 타이밍이라고 한다. 지금의 선택이 10년 후 국민의 권익을 결정할 것이다.물론 경쟁력과 독과점은 동전의 양면이지만 독과점 체제 속에서도 소비자 권익을 방어하는 가장 확실한 해법은 ‘대안적 경쟁자’를 육성하는 것이다. 정부가 진정으로 국민 편에 서고자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선택권을 확보하는 시스템 구축에 착수해야 한다. ‘대안적 경쟁자’가 해법…하늘의 문 더 활짝 열어야 무엇보다 외국 항공사의 국내 진입을 적극 확대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오픈스카이 협정 체결국은 20개국 수준에 불과하다. 미국은 100여 개국과 협정을 맺고 있다. 한국도 제3국 자유화 협정을 확대하고 인천공항 슬롯을 외항사에 적극 개방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국적 항공사 외에도 실질적인 경쟁 구조가 유지될 수 있다.국내 저비용항공사(LCC) 육성도 필수다. 대한항공-아시아나 통합은 LCC 계열사까지 흡수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독립적 LCC가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슬롯 우선 배정, 지방공항 활성화, 재정지원 등의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항공 외 대체 교통수단 확대도 병행돼야 한다. ▲수도권~지방 간 고속철도망 확충 ▲초고속철도 도입 ▲고속버스 국제노선 개발 등으로 항공 독과점 의존도를 줄일 필요가 있다.여기에 더하여 관광 산업에 미치는 영향 또한 세심히 살펴야 한다. 여행 수지만 맞추어도 경제 성장율이 거의 1% 오른다고 한다. 그야말로 굴뚝 없는 공장이 수출기업이 되는 또 하나의 길이다. 국내외 항공 노선과 좌석 선점은 관광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요소이다. 독과점 사업으로 인한 가격, 서비스, 끼워팔기와 같은 악습이 공정하게 개선되도록 정책당국은 히든카드를 마련해 외국 관광객 증대와 국민의 여행 욕구에 적합한 길을 찾아야 한다. 소비자단체의 역할도 더 커져야 한다. 항공소비자권익감시단을 활성화하고 집단소송제 도입을 검토해 마일리지 정책 변경 등 소비자 피해에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공공요금 비교 플랫폼을 구축해 소비자 스스로 가격·서비스 정보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K사와 A사의 합병은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소비자 재앙이 될지 정상적 재편이 될지는 정부 정책에 달려 있다. 정부가 실질적 경쟁 기반 확대에 나선다면 독과점의 폐해를 상당 부분 차단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국 미국과 유럽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게 될 것이다. 항공사도 외국 항공사를 불러들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정부가 지켜야 할 것은 국적항공사의 시장 독점이 아니라 국민의 선택권이다.

2025.08.24 09:00

4분 소요
10포인트 글씨가 당신의 50대 이후를 결정한다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해외 리조트에 있는 수영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한 노부부가 풀사이드 베드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장면인데, 한국 영화에서는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탑골 공원에서 책 읽는 노인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해외에서는 평범한 일이 한국에서는 특이한 일이 되는 이유가 있다. 한국 노인은 왜 수영장에서 책을 읽지 않을까 무엇보다 책을 대하는 두 나라의 태도 차이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여기에 ‘노안’에 대한 두 나라의 관심과 대응의 차이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노안은 보통 40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자연스러운 노화다. 가까운 거리의 사물을 보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현상이다. 거리에 따라 초점을 맞추기 위해 수시로 두께를 조정해야 하는 수정체가 점점 딱딱해져 충분히 두꺼워지지 않는 것이 이유다. 수정체 주변 근육의 힘이 약해지는 것도 원인이다. 그래서 젊을 때 잘 보이던 가까운 거리의 글씨가 잘 안 보이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스마트기기 등으로 인해 하루 종일 가까운 거리를 보다 보니, 30대부터 노안이 시작되는 추세다. 소위 말하는 디지털 노안이다.한국에서는 노안이 오면 돋보기를 많이 쓴다. 돋보기는 말 그대로 가까운 거리만 더 잘 보기 위해 쓰는 안경이다. 먼 거리를 볼 때는 벗어야 하니, 하루에도 수시로 썼다 벗었다 반복하게 된다. 먼 거리가 잘 안 보이는 근시가 있었던 사람이라면 먼 거리용 안경과 가까운 거리용 안경을 번갈아 가면서 써야 한다. 이 때문에 종종 안경을 잃어버리거나 번거로워서 ‘에이, 그냥 좀 덜 보고 살지 뭐’ 하게 된다.이런 번거로움과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누진다초점 렌즈다. 누진다초점 렌즈 하나에는 두 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초점이 들어가 있다. 먼 거리와 가까운 거리를 번갈아 볼 때, 안경을 바꿔 쓸 필요가 없다. 노안을 위한 최적의 솔루션인 셈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솔루션이 얼마나 잘 활용되고 있을까. 필자가 렌즈 회사 대표님께 들은 데이터로는 미국 노인의 60%가 누진다초점 렌즈를 쓴다고 한다. 반면 한국은 10%도 되지 않는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될까. 일단 한국 안경 시장을 들여다보자. 한국 안경원 시스템의 속도와 가성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에서 안경은 언제든 매장에 방문하면 1시간 내로 맞춰서 나올 수 있는, 거의 표준화된 상품에 가깝다. 대부분의 안경 매장들은 다양한 종류의 렌즈를 재고로 갖고 있고 시력 검사용 장비와 렌즈 가공 장비도 갖추고 있다. 원스톱으로 빠르게 안경을 구매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구축되어 있다. 한때 안경원이 떼돈 번다고 소문났던 시절이 있었다.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하고, 인터넷이 없어서 가격 비교가 안 되던 옛날이야기다. 지금은 인구 4683명당 하나 수준으로 안경원이 난립해 있다. 미국은 인구 1만893명당 한 곳이다. 한국은 자연스럽게 경쟁이 치열해졌다. 취급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비슷비슷하다 보니, 결국 가격 경쟁으로 갔다. 동네마다 마주 보는 안경원끼리 치킨게임을 하느라, 렌즈를 포함해도 안경을 맞추는 데 10만원 선이 일상적인 가격이 되었다. 지난 20년 동안 국민 소득은 3배가 올랐는데, 안경 가격은 10% 떨어졌다는 통계도 있다. 싸고 빠른 한국 안경,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안경 객단가는 떨어지는데, 부동산과 인건비는 계속 오른다. 예약제가 여전히 정착되지 않다 보니 고객들은 주로 주말 오후에 몰린다. 한정된 주말 시간 동안 한 명이라도 손님을 더 받아야 돈을 벌 수 있다. ‘빨리빨리’는 성질 급한 한국 고객의 성향과도 잘 맞는다. 결국 안경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나에게 제대로 맞추는 ‘시력 보정 도구’가 아니라, 싸고 빠르게 집어 가는 ‘물건’이 됐다. 안경을 이렇게 싸고 빠르게 살 수 있는 게 문제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소비자에 따라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번에는 미국 안경 시장을 들여다보자.한국은 눈과 안경에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군이 안과의사(Ophthalmologist)와 안경사(Optician) 2단계로 되어 있다. 안경사는 대학에서 안경 광학과를 졸업하고 국가 면허를 획득한 의료기사다. 안경 도수 조정을 전제로 법률로 일부 허용된 시력검사를 할 수 있다.반면, 미국은 총 3단계로 되어 있다. 안과의사와 안경사 사이에 검안사 (Optometrist)가 있다. 질환과 시력을 안과의사가 모두 담당하는 한국과 달리 질환은 안과의사, 시력은 검안사로 어느 정도 역할이 나눠져 있다. 미국의 검안사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4년 동안 검안 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의학박사는 아니지만, 일반인들은 검안사를 아이닥터(Eye Doctor)라고 부른다. 의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료 전문가로 대접한다.한국에서는 안과에서 안경을 처방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경원에서 시력검사를 받고 바로 안경을 구매한다. 미국은 시력검사와 안경 처방은 검안사에게 받고, 처방받은 렌즈를 판매하고 가공하는 업무는 안경사가 담당하는 것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검안사에게 안경 처방을 받는 데에만 보통 10만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한다. 한국에서 그 돈이면 웬만한 안경을 맞출 수 있다.처방전을 들고 안경원에 가면, 안경테와 렌즈에 최소 30-40만 원 정도를 쓰게 된다. 고급 사양으로 고르면 100만 원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필자가 창업한 3D 맞춤 안경 브랜드 브리즘의 뉴욕 맨해튼 매장도 렌즈를 포함한 안경 객단가가 한국보다 훨씬 높은 70만원에 육박한다. 가격은 비싸지만 대부분의 미국 안경 매장은 재고 렌즈나 가공 장비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전문 공장에 렌즈 가공과 장착을 위탁한다. 오며 가며 시간이 걸리니 한국에서는 30분이면 완성될 안경이 미국에서는 짧아도 3~4일은 걸려야 완성된다. ‘안경 하나 맞추는데, 뭐가 그리 복잡하고 비싸?’ ‘유학생들이 한국 들어와서 안경 세 개씩 맞춰가는 이유가 있네’ 등 다들 한국 시스템을 칭찬한다. 분명 장점이 많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럴까라는 고민을 할 때다. 아직 젊은 나이에 근시가 좀 있을 뿐인 고객에게는 한국 시스템이 맞다. 하지만 노안이 시작되어 시력적 불편이 커진 사람들에게는 미국 시스템이 적합하다. 누진다초럼 렌즈 오명, 문제는 렌즈가 아닌 ‘시스템’에 있어 한국에서도 안경사가 아니라 안과 의사에게 가서 시력검사를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시력검사와 안경 처방을 의료 보험을 통해 진행할 때 보험 수가가 매우 낮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제대로 하려면 30분은 족히 걸리는 이 프로세스를, 5분 진료가 보편적인 한국에서 몸값 비싼 안과의사가 직접 한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으로는 도저히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 대형 안과에서는 젊은 안경사를 고용해 시력검사를 맡기는 게 일반적이다. 의사는 마지막에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역할 정도만 하고 있다.안경 처방은 단순히 1.0 시력을 기준으로 현재 시력이 모자란 것을 더해주면 끝나는 작업이 아니다. 장비를 통해 광학적으로 눈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다. 다음으로 안경 착용자가 어떤 환경에서 눈을 많이 쓰는지, 어떤 부분에서 특히 불편을 느끼는지 꼼꼼히 챙기고 이를 반영해서 렌즈를 선택하는 과정이 필수다.미국에서 브리즘과 협업 관계인 검안센터의 검안사가 안경을 처방하는 과정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미국에서 통상적으로 시력검사는 100달러 정도다. 다만 상세한 검안 옵션을 선택하면 300달러가 넘어가고, 무척 다양한 장비를 동원해 40분 이상 검사와 상담을 진행한다. 브리즘도 시력검사와 렌즈 상담에 30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지만, 미국 검안사가 수행하는 시력검사 과정은 훨씬 더 길고 꼼꼼했다. 특히 누진다초점 렌즈는 고객의 생활 습관과 직업 등을 반영한 세밀한 설계가 필요하다. 안경 착용자가 먼 거리를 많이 보는지 가까운 거리의 작업을 많이 하는지 등을 꼼꼼하게 살펴봐야 한다. 이 상황에서 가까운 거리는 70cm 거리의 노트북 화면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3m 거리의 거실 TV를 이야기하는 것인지와 좌우를 볼 때 눈동자를 돌려서 보는지, 고개를 돌려서 보는지 등의 습관과 환경에 대한 세심한 파악이 필요하다.40분 동안 아이닥터의 상세한 설명과 상담을 거쳐서 처방된 누진다초점 렌즈와 10분 이내의 짧은 시력검사 과정을 통해 추천된 렌즈를 비교할 때 고객의 수용도와 적응도가 어느 쪽이 더 높을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결국, 한국에서 누진다초점 렌즈는 어지러움과 부적응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인이 누진다초점 렌즈를 쓰고 가다 계단에서 넘어졌다더라’ ‘차를 운전하다가 사고를 냈다더라’ ‘어지러워서 못 쓴다더라’ 등 수많은 전설이 난무하다. 대부분 적응을 위한 꼼꼼한 상담과 충분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월 2만원 투자 아끼지 말아야 할 때 “김 대리, 이 보고서 12포인트 폰트로 다시 출력해 줘.” 주변에서 임원 보고용 보고서를 10포인트 폰트로 작성했다가 야단맞았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정보는 10포인트 글씨로 흐른다. 신문·책·잡지도 10포인트로 작성된다. 내가 10포인트 글자를 읽지 못한다면, 그 글자들은 무의미한 배경으로만 보이게 된다. 50대 이후 우리들의 삶은 행동반경과 새로운 경험의 양이 줄어드는 시기다. 여기에 텍스트를 통해 입력되는 정보량마저 크게 줄어든다면 삶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눈은 노출된 뇌로 불린다. 뇌는 두개골이라는 골방 속에 갇힌 어둠 속의 장기다. 이런 암흑 속 뇌를 돕기 위해 눈에서 엄청난 시각 신경다발이 뇌로 직접 연결,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량의 80% 이상을 뇌로 보내주고 있다. 시력이 떨어져 세상이 흐리게 보이면 그만큼 뇌로 들어오는 정보의 양도 줄어든다. 노인들의 교정시력, 즉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낀 이후의 시력이 낮아지면 치매 유병률이 유의미하게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는 수도 없이 나와 있다. 시력은 50대 이후의 삶에서 우리의 생산성과 건강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다행히 조금만 관심을 갖고 찾아보면 교정 시력을 확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많이 출시되어 있다. 오랜 공부를 기반으로 꼼꼼하게 시력검사를 진행하는 안경원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안경 한 번 바꾸면 못해도 2년을 쓴다고 생각하면, 50만원을 투자하면 월 2만원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삶의 질을 이렇게 극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도구에 월 2만원 정도 쓰는 것을 아까워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50대 이후의 삶, 10포인트 폰트를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한 개인으로서의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한다.한국, 최고 수준의 저시력 사회 오명 가장 대표적인 민생회복 소비쿠폰 사용처로 꼽히는 곳이 안경원이다.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비용이 아닌, 내 삶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대상이 안경이어야 한다고 믿는다.시력 관리는 국민 건강 차원을 넘어, 생산성과 국가 경쟁력 유지를 위한 중요한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관심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안경이 본연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안경 산업 종사자들의 뼈를 깎는 노력이 절실하다.머지않아 모두가 스마트글라스를 착용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눈앞에 스마트폰 화면을 달고 다니듯, 우리의 시야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이는 국민의 눈 건강을 더욱 위협하는 동시에, 시력을 통해 정보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 사이의 생산성과 삶의 질 격차를 크게 벌릴 것이다.이미 나빠진 시력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적절한 방법을 활용하면 교정 시력은 충분히 향상할 수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저시력 사회인 한국에서 전 국민의 교정 시력 향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결국 ‘10포인트 글씨’를 읽을 수 있는가 없는가가 인생의 질을 좌우한다. 필자는 3D 맞춤 안경 스타트업 브리즘의 공동창업자이자 공동대표다. 2006년 패션 아이웨어 전문 브랜드 ALO를 창업한 이후, 20년간 안경업계에 몸담아 왔다. 브리즘은 한국과 미국에 총 15곳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 스타트업 최초로 하버드경영대학원의 사례 연구 주제로 선정되어 올 가을학기 수업에서 다뤄질 예정이다.

2025.08.24 08:00

8분 소요
변심한 동맹, 그리고 코리아 퍼스트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있는데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종전 협상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딱 미운 시누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월 18일 미국 백악관에서 진행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종전을 위한 회담에서 지난 2월 때처럼 언쟁을 벌이고 내쫓지 않았지만, 핵심 사안인 안보 보장과 영토 문제에서 푸틴 대통령의 편에 더 가깝게 서서 이야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내내 무기 등의 지원에 인색했고, 휴전이나 종전에 대해 러시아보다는 우크라이나를 더 압박했습니다. 이는 서방 진영의 좌장인 미국이 지금까지 보여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미국의 변심은 글로벌 관세 협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는데요, 동맹이나 우방국이라고 해서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대만의 경우 별다른 협의 없이 한국·일본·유럽연합(EU)에 부과한 15%, 필리핀의 19%보다 높은 20%를 일방적으로 적용했는데요, 대만으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만은 최근 몇 년간 미국과 함께 중국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며 ‘친미’ 바람이 불었는데,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군사·경제 분야에서 찬바람이 불면서 민심이 바뀌었습니다. 대만의 소셜미디어에서는 ▲“미국이 대만을 ATM처럼 이용한다” ▲“배신당했다” ▲“우크라이나 다음은 대만” 등 불만과 우려가 터져 나왔으며, 여론조사에서 ‘유사시 미국이 지원할 것’이라는 기대는 40%대에서 30%대로 하락할 정도로 ‘못 믿을 친구’라는 불신이 커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유 진영의 맹주를 버리고 우방국도 때리는 ‘글로벌 악동’으로의 변신에는 국력이 쇠락해 가는 늙은 호랑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Make America Great Again, MAGA) 위한 ‘미국 우선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각국과의 관세 협상 과정에서도 “친구가 적들보다 더 나빴다”고 말하며 동맹이어도 미국이 손해 보는 일은 더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차 명확히 했습니다.전 세계는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1월 취임하고 8개월간 초강대국 미국이 외교·통상 무대에서 정책 기조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직접 경험했는데요, 문제는 그가 퇴임한 이후에도 ‘미국 우선주의’ 기조나 관세 정책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는 겁니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체이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관세가 미국 산업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고, 기업들도 이 같은 관세 환경에 맞춰 투자 구조를 재편하고 있어 자유무역으로 회귀할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습니다.이재명 정부는 이렇게 달라진 미국을 상대로 국익을 지켜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입니다. 기존처럼 동맹을 우선순위에 놓는다면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처럼 ‘코리아 퍼스트’(Korea First)를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할 것입니다.

2025.08.24 07:00

2분 소요
낡은 건물을 살리는 기술이 도시를 바꾼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우리는 지금 고령 인구만큼이나 노후한 건물과 기반시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산업화와 고도성장기에 우리 사회는 오래된 건물을 보면 무조건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해결책이라고 여겼다. 특히 주거 부문에서는 노후하면 재개발이나 리모델링을 떠올렸고, 이는 돈이 되고 지역에도 도움이 되는 ‘도시 관리의 공식’처럼 작동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조건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재건축초과이익 환수나 각종 규제 때문만이 아니다. 억 단위로 치솟은 공사비 때문만도 아니다.탄소배출 억제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국제적 규범이며, 건축물의 신축·철거 과정에서 발생하는 축적탄소(Embodied Carbon)는 이미 전 세계 CO₂ 배출량의 11%를 차지하면서 골치거리로 지목되고 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Global Status Report for Buildings and Construction (2021)’에서 “신축 중심의 건축산업 구조로는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다. 각 도시들은 새로 짓는 건축보다 기존의 낡은 건물의 처리가 더 골치가 아프다. 오래된 공용공간과 산업유산의 노후화가 누적되면서, 관리비용이 부담되기 시작했다. 도시재생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이제는 이런 공간들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보다 ‘역할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Adaptive Reuse (한국어로는 ‘적응형 재사용’으로 통용)이며, 이를 구현하는 기술적 수단이 리트로핏(Retrofit)이다.리트로핏은 어떻게 도시전략이 됐는가리트로핏은 1970~80년대 노후 산업시설 개조 과정에서 등장한 개념으로, 초기에는 설비 교체·보강을 통한 수명연장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기후위기, 디지털 기술, 생태자원 활용이라는 새로운 환경과 결합되면서 이제는 기존 공간의 기능뿐 아니라 가치와 의미를 재설계하는 도시전략으로 진화했다. 최근에는 고단열 창호와 고효율 설비를 적용한 탄소감축형 리트로핏, 3D 스캐닝 및 BIM 설계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통합형 리트로핏, 생태소재를 기반으로 한 생태순환형 리트로핏까지 등장하면서 ‘리트로핏 = 미래도시 기술 인프라’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각 국가의 정책 수준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다. EU는 2020년부터 ‘Renovation Wave Initiative’를 통해 기존 건축물의 리노베이션 비율을 연간 2배 이상으로 높이고 있으며, 미국 정부(GSA) 또한 ‘Historic Building Reuse Program’을 통해 공공시설에 리트로핏 우선 적용 의무제를 도입했다. 선진 도시들은 이미 ‘신축 중심의 프레임에서 전환’하는 단계를 넘어, 이를 도시정책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디트로이트의 미시간 중앙역은 1910년대 자동차산업의 전성기를 상징하던 공간이었지만 1988년 폐쇄 이후 수십 년 동안 방치된 채 황폐화돼 있었다. 전환의 전기는 2018년 포드(Ford)가 이 역사를 매입하면서 마련됐다. 당시 복원 방향은 단순한 ‘산업유산 보존’이 아니라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를 위한 도시거점 조성’에 있었다. 외관은 원형을 유지한 채 내부를 스타트업 오피스와 연구소, 고용훈련센터 등으로 재구성했으며, 기존 철골 구조에는 탄소섬유(FRP) 보강을 적용했다. 대형 천창에는 고단열 투명패널을 설치하고 전체 설계는 BIM 기반으로 진행해 역사성과 첨단 기술의 공존을 구현했다.프랑스 아를(Arles)의 루마 아를(LUMA Arles)은 기존의 19세기 철도정비단지를 예술·MICE 복합 캠퍼스로 전환한 사례다. 산업쇠퇴 이후 오랫동안 유휴공간으로 남아 있던 이 부지는 프로젝트 초기부터 ‘철거’가 아닌 ‘전환’을 핵심 전략으로 설정했고, 기존 석조 공장동은 3D 스캐닝과 디지털트윈 모델링을 통해 보존 구역과 개조 구역을 세밀하게 구분했다. 이후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신축 타워를 기존 동선을 기반으로 입체적으로 삽입하고, 내부 마감에는 해조류 단열판과 소금벽체 등 지역 생태소재를 적용함으로써 산업유산 위에 문화·생태 가치를 덧입힌 전환 전략을 실현했다.캐나다 토론토의 아트스케이프 위치우드 반즈((Artscape Wychwood Barns)는 기존 노면전차 차고를 지역 문화 및 공동체 공간으로 전환한 대표 사례다. 건물 외벽은 기존 형태를 유지하면서 일부 지붕을 개방하여 반(半)옥외형 공공광장을 조성하고, 실내에는 예술가 주거공간과 커뮤니티 키친, 도시정원 등을 복합적으로 배치했다. 동시에 태양열 온수설비와 빗물재활용 시스템, HVAC 리트로핏 등 에너지 성능 개선 기술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지역 공동체 활성화와 친환경 전환을 동시에 달성했다. 이 공간은 현재 토론토 시민들의 일상이 모이는 대표적인 지역 거점으로 자리잡고 있다.리트로핏은 더 이상 대안이 아니라 ‘우선 전략’이다리트로핏은 더 이상 ‘건물 수리 기술’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회복하는 전략적 언어다. 실제로 신축 대비 탄소배출은 평균 40~50% 줄고 공시간은 25~30% 단축되며, 지역 고용 및 창업 생태계 유입 등 경제·사회적 파급효과도 입증되고 있다. 문제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보려는 시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노후 건축물과 공간을 여전히 ‘주택’ 중심 혹은 ‘경제성’ 중심으로 바라보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휴 산업단지, 항만부지, 공공 기반시설 등 잠재된 도시 자산을 어떤 전략으로 전환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현재 일부 도시재생 사업에서 적응형 재사용이나 리트로핏 방식이 논의되고 있지만, 여전히 ‘재개발·재건축의 대안’으로 간주될 뿐 정책의 중심으로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소극적 대안’이 아니라 ‘우선 전략’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다음편에 계속)

2025.08.23 14:00

4분 소요